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부 바크르 (문단 편집) == 칼리파 취임 이후 == >내가 《[[쿠란]]》과 《[[무함마드]] 언행록》에 따라 행동하면 나를 따르고, 그렇지 않으면 내게 순종하지 말라. 칼리파 즉위 이후 아부 바크르가 처음으로 내린 결정은, 무함마드의 양손자 우사마 빈 자이드가 지휘하는 원정대 파병 여부였다. 임종 몇 주 전, 무함마드는 동로마 제국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양아들 자이드의 원수를 갚도록 그의 아들 우사마에게 요르단 방면 원정군 지휘관을 맡겼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죽음으로 출정은 연기되었고, 우사마는 칼리파에게 승인을 청했다. 한편 우마르 등은 우사마가 18세에 불과하니 새로운 지휘관을 선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아부 바크르는 그대로 추진하는 것이 외부에 이슬람 공동체가 흔들리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 강행했다. 그 결과 우사마 빈 자이드는 40일 후 승리를 안은 채로 귀환했고, 무함마드의 결정을 존중한 아부 바크르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우사마의 승전보는 아라바아 반도 각지에서 배교 반란([[릿다 전쟁]])이 들끓던 상황에서 불안했던 이슬람 진영에 자신감을 안겨준 희소식이었다.[* 실제로 많은 배교자들이 이슬람으로 돌아왔다] >1. 어린이, 노약자, 부녀자를 살상하지 말 것 [br] 2. 인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 [br] 3. 초목을 해치거나 불사르지 말 것. 과실을 자르지 말 것. [br] 4. 소, 낙타 등 짐승을 도살하지 말 것 [br] 5. 신앙에 충실할 것 출정에 앞두고 아부 바크르는 청년 우사마 빈 자이드를 마중나가며 그에게 위와 같은 규율을 전했는데, 이는 후에 이슬람 군대의 기본 지침으로 자리잡았다. 19세기에 논의된 제네바 협정과 상당히 겹친다는 점에서, 이러한 도덕률은 아부 바크르의 치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특히 전쟁 중 인명이나 재산 뿐만 아니라 자연 환경까지 신경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척박한 상황에서 살아온 아랍인들의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활약과 함께 633년 봄까지 [[아라비아 반도]]를 완벽히 정비한 아부 바크르는 이후 타지역으로의 팽창을 시작했다. 그는 비록 초기 개종자는 아니었지만 능력이 입증된 칼리드를 총사령관에 임명하는 강수를 두었고, 믿음에 보답한 칼리드는 633년 히라 함락, 634년 보스라 함락 및 아즈나딘 전투 등 연이은 승전보를 올렸다. 동시에 《[[코란]]》의 의미가 왜곡되거나 달라지는 형상을 보였기 때문에(《[[코란]]》 항목 참고) 아부 바크르는 《[[코란]]》의 의미를 바로 잡는 대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부 바크르가 2년 만에 죽었기 때문에 이 작업은 제3대 칼리파인 [[우스만]]에 와서야 완성된다. 칼리파로 추대받을 수 있었던 겸손하고 자비로운 성품은 이후에도 변함이 없어 소박한 옷을 입으며 검소하게 살았고, 사사로운 재산 축적을 하지 않았다. 아부 바크르 자신이 옳을 때가 아니라면 아무도 그의 통솔에 따를 의무가 없다는 스스로의 사상을 철저히 지켜 그 자신이 이슬람 공동체('''[[움마#s-2|움마]]''') 내부에서 우월하게 보일 어떠한 움직임도 거부하면서 평등한 공동체의 대표로 처신했다. 또한 본래 대단히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부 바크르이지만 [[이슬람]]으로 개종한 노예들을 해방시키고자 막대한 재산을 소모한 데다 메디나 이주 과정('''[[헤지라]]''')에서 그나마 남은 재산마저 압수당하면서 칼리파 취임 당시에는 대단히 가난한 상태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호의호식도 거부하면서 움마(이슬람 공동체)를 지도하면서 나오는 적은 봉급만을 받았고, 상업 활동을 재개하며 때때로는 이웃의 소젖을 짜주면서 스스로의 생계를 꾸려가고자 노력했다. 아부 바크르는 다마스쿠스 포위가 한창이던 634년 8월 말엽,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나온 이후,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심각한 고열을 앓기 시작했다.[* 전승에 따라서는 음식을 잘못 먹어서라는 주장도 있다.] 곧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짐을 느낀 아부 바크르는 이슬람 공동체의 주요 인사들을 소집하여 무함마드 사후 벌어진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그의 계승자로 [[우마르]]를 지정했고, 우마르의 거친 성미 탓에 모두가 꺼릴 때, 주요 계승 후보인 알리가 우마르를 적극 지지하는 놀라운 일을 통해 우마르의 계승이 확정되었다. 아부 바크르는 이에 안도감을 느끼며 8월 23일 세상을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